비전화저널

[인터뷰] 글 쓰는 청년 농부 ‘김예슬’

2018년 09월 12일

 

김예슬 씨를 만난 건 지난 6월 비전화공방(www.noplug.kr )에서 열었던 ‘손과 손이 만나는 캠프’였습니다. 그녀는 경남 합천에서 사는 오년 차 농부입니다. 지도 없는 길을 자신만의 방향 감각으로 찾아가는 김예슬 씨의 이야기를 전합니다.

 

김예슬 씨는 농부다. 스무 살이 되던 해, 합천 황매산 자락에 귀농했다. 그전엔 가족 모두 도시에 살았다. 엄마와 아빠, 남동생, 그녀 모두 시골살이 오 년 차다.

“신기하게 다 알고 계시더라고요. 내 뭐 하는지.”

도시에서는 사생활이라 여겼던 일상의 풍경이 농촌에서는 쉽게 드러났다. 당장 밭이 보이니 뭘 심었는지, 농사는 어떻게 짓고 있는지 서로 훤했다. “저짝 밭에 고구마 심어놨데.”, “어데 댕겨오나? 요새 잘 안 보이데.” 무심한 듯 던지는 말 속에서 젊은 농부를 향한 어른들의 관심을 읽었다.  

“저희 밭에 와서 약 쳐준다는 어르신도 많았어요. 풀이 저렇게 많아서 어떡하냐고. 멀칭(mulching, 바닥 덮기) 안 한다고 얘기도 많이 듣고요. 다행히 마을 안에 있는 밭은 해마다 농사가 됐어요. 몇 번 보시고 ‘저래도 되네’ 하니까 이제 말씀 안 하세요.”

생애 첫 농사라 우왕좌왕했지만, 힘들다고 약을 치고 싶진 않았다. ‘몸 공부’를 오래 한 어머니는 어릴 때부터 남매에게 자연과 인간이 연결되어 있음을 가르쳤다. 목회자인 아버지는 합천에 자리 잡으며 십자가를 세우지 않았다. 생명을 살리는 농사 또한 사역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녀의 가족이 약을 치지 않고, 맨몸으로 풀을 매는 농사를 짓는 건 어찌 보면 당연했다.

운 좋게도 합천에는 ‘닮고 싶은 농부’가 많았다. 이십 여년 전 귀농해 공동체를 이룬 농부들은 그녀에게 몸으로 부딪혀 익힌 기술을 아낌없이 나눴다. 곁에서 눈으로 보고, 몸으로 도우며 자연스레 농사를 익혔다.

“첫해에는 잘 모르니까 ‘그거 했나?’라고 물어보면 ‘어? 안 했는데?’ 그러면서 막 우르르 가서 허겁지겁하고 그랬어요. 그 농부님들 만나 잘 배웠죠. 어른이라고 절 가르치거나 그런 모습 없이 그냥 자기 삶을 있는 그대로 나눠주셨어요.”

덕분에 올해는 천여 평의 밭을 일궜다. 작물은 좋아하는 것 위주로 심는다. 고구마, 감자, 양파, 생강, 수수, 콩, 배추 등 자급은 물론 판매까지 생각해 넉넉히 짓는다. 부유하진 않지만, 밥 안 굶고, 여행 가고, 보고 싶은 영화는 볼 정도로 번다. 첫해에는 수입이 안 나 가족과 과수원 알바를 뛰기도 했다. 만만찮은 일이었지만, 아무도 그만하고 싶다 소리는 하지 않았다. 어릴 때부터 자연 가는 게 최고의 휴가일 만큼 가족 모두 시골살이를 마냥 좋아했다.

<우리 감자>라고 그녀가 보내준 사진

놀아야 농사할 맛도 난다

농부라고 매일 일만 하는 건 아니다. 놀아야 농사할 맛도 난다. 음악을 좋아하는 그녀는 친구들과 함께 집에서 ‘콘서트’를 열기도 한다. 유명 강사를 찾기보다는 둘러앉아 동네 사람들 사는 이야기도 듣는다. 만나고 싶은 저자나 활동가가 있으면 초대한다. 그렇게 한 달에 한 번 그녀의 집에는 마을 사람들이 만드는 ‘담쟁이 인문학교’가 열린다. 담쟁이처럼 느리게 한 발, 한 발 어느새 나아간 지도 모를 만큼 그렇게 찬찬히 하고 싶은 일을 하자는 의미다. 매달 많게는 칠십 명, 적게는 스무 명이 모인다. 모임 공간은 집에 딸린 작은 카페다. 이곳에서는 벌이지 못할 일이 없다.

배움의 물꼬를 스스로 트는 힘은 일찍이 깨우쳤다. 학교 대신 ‘홈스쿨링’하며 육 년을 살았기 때문이다. 부모님이 제안했고, 그녀가 선택했다. 열네 살 때였다.

“어린 나이인데도 고민 많이 했어요. 다 가는 학교를 안 간다는 거. 그래도 학교 안 가는 게 좋으니까요. (웃음) 부모님을 믿는 마음도 컸고요.”

처음에는 멍 때리는 날이 많았다. 부모님은 시간표를 짜주지 않았다. 밤늦게 공부하는 또래를 보면 혼자 다른 세계에 떨어진 느낌이었다. 그렇게 일이 년 멍 때리니 질문이 하나 생겼다. ‘나는 뭘 좋아하는 사람일까?’ 자연스레 몸이 집 밖으로 향했다. 비슷한 고민을 하는 친구들과 만나 함께 여행하고 공부했다.

그때부터 어렴풋이 ‘글 쓰는 OO’으로 살고 싶다 생각했다. 어릴 때부터 글 쓰는 게 좋았지만 그게 다는 아니라는 생각에 빈칸을 남겨두었다. 오년 전, 귀농하며 그 칸이 채워졌다. 부모님은 언제든 그 칸을 새로 쓸 수 있다며 가능성을 열어주지만, 그녀는 농부인 게 좋다. “일하는 사람이 글을 써야 한다. 그래야 세상이 아름다워진다.”라는 서정홍 시인의 말을 늘 가슴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한 달에 두 번 하는 신문 연재도 그 말의 힘을 빌려 시작했다. 거친 손을 부끄러워하는 세상일수록 흙 만지는 농부의 이야기가 필요하니까.

저는 낭만이라는 말 되게 좋아해요. 근데 가끔 ‘네 이야기를 들으면 꼭 다른 세계에서 온 사람 같다’라는 분들이 있어요. 그럴 때면 ‘나한테는 평범한 일상이고 현실인데 왜 누군가에게는 다른 세상 이야기가 되는 거지? 내가 정말 다른 세상에 사는 건가?’ 하면서 내 얘기 하기가 조심스러웠어요.
고민했죠. 내가 생각하는 낭만은 뭔가. 낭만은 뭔가 즐겁고 아름답고 편안하기만 한 게 아니라, 지금 내가 있는 자리에서 아름다운 것들을 보는 힘이라 생각해요. 그러니까 사람들 앞에서 내가 생각하는 낭만을 얘기하는 게 편해졌어요. 내 삶에도 당당해졌고요.

충분히 제가 사는 모습도 평범해요. 그냥 농부에요. 농사짓고 좋아하는 글 쓰고 기타 치고 노래하고 멍때리고 앉아있거나. 그 속에서 뭔가 나 스스로 낭만을 찾아갈 수 있다는 게 시골살이를 지속하는 힘이 돼요. 그래서 지금도 전 어디 가면 낭만이라는 말 좋아한다 얘기해요, 그냥. 이제는 눈치 덜 보고.”

사는 일에 어디 지도가 있겠냐만, 1.9%의 이십대 농부로 살아가는 건 나침반 없이 길을 가는 것과 같았다. 길을 잃은 것 같은 때면 멍 때리거나 글을 썼다. 마음의 소리에 귀 기울이기 위해서다. 그러다 보면 인생이, 낭만이 별건가 싶다. 멀리 내다보며 불안해하기보다는 지금에 머무르며 감사한다. 땀 흘리고 일하나 나무 아래 차를 마시나 기타를 치나 그녀가 늘 ‘낭만 농부’인 이유다.

 

담쟁이 인문학교에서 이야기하는 김예슬 씨(좌)

 

∴ 글         우민정
∴ 사진     김예슬
∴ 디자인     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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