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전화저널

[인터뷰] 우보농장 이근이 대표

2017년 09월 13일

 

“농부는 수확의 기쁨만 아니라, 모든 순간에 애정을 가져야 한다.
작물의 생로병사를 모두 아름답다고 느낄 수 있어야 한다”
(비전화 제작자 민영의 에세이 中 우보의 가르침)

우보의 농사법은 단순하고 우직하다. 땅을 다치게 하는 건 일절 사용하지 않는다. 그의 농장엔 농약이나 화학비료 대신 거름을 만드는 ‘생태 뒷간’이 있다. 검은 비닐이 아닌 풀로 땅을 덮고, 씨앗을 사지 않고 직접 받아서 뿌린다. 이 모든 것이 가능한 이유는 “수확의 기쁨에만 매달리지 않기 때문”이다. 수확의 기쁨에 매달리다 보면 “농약이나 화학비료의 유혹을 뿌리칠 수 없다”. 그래서 농사에 중요한 건 기술보단 철학이다. 비전화 제작자들에게 농사를 가르칠 때도 그는 작물을 잘 키우는 방법보다는 땅에 대한 태도를 먼저 가르친다. 작물을 키우는 건 흙의 일이다. 농부는 다만 모든 순간을 애정으로 지켜보다 작물이 필요로 할 때 자기 할 일을 하면 된다.

그는 유기농 인증도 받지 않는다. 지금의 유기농 인증제는 ‘농약이 검출되냐, 아니냐’만 보기 때문이다. 결국, 사람에게 이로운가 아닌가만 따지는 제도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러다 보니 비닐을 쓰고, 거름을 많이 써 땅을 다치게 해도 유기농 인증을 받을 수 있다. 그는 땅과의 유기적 관계, 미생물과의 유기적 관계, 이 모든 순환을 생각해야만 진정한 유기농이라 말한다.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풀을 어떻게 없애지?’만 생각하면 결국 땅을 망치는 선택을 하게 된다. ‘풀을 어떻게 활용하지?’로 시각을 전환하면 비닐 대신 풀을 활용해 밭을 덮을 수도 있다. 그러면 풀이 자라는 게 오히려 기다려진다. 그렇게 공생의 마음으로 자연을 바라보면 농사일이 즐거워진다는 게 그가 경험을 통해 터득한 지혜이다.

 

비전화공방의 농사 안내자인 우보농장의 우보(이근이 대표의 별칭),  까맣게 그을린 피부에서 그의 일상이 엿보인다.

 

할머니들의 ‘전통 농법’을 배우다

십육 년 전만 해도 그는 농사의 ‘농’자도 모르던 도시 사람이었다. 시작은 다섯 평 텃밭이었다. 처음엔 그저 도시 생활에 숨통을 트고자 주말농장을 시작했다. 잘 모르기 때문에 더 농사일에 빠졌는지도 모른다. 흙을 만지기 전에는 몰랐던 작물의 다채로운 색과 모양이 눈에 들어왔다. 예측할 수 있는 게 하나도 없고, 매번 새로웠다. 농사는 자꾸만 그의 상상력을 자극했다. 이듬해엔 ‘동광원’이란 곳으로 옮겨 텃밭을 계속 일궜다. 그곳에서 그는 인생의 전환을 맞는다.

“‘동광원’에서 할머니들이 농사짓는 거 보고 “야, 이게 진짜 농사구나” 싶었죠. 그분들이 하는 농사의 핵심이 ‘순환’이에요. 똥을 거름으로 만들고, 그 땅에서 자란 걸 또 먹고, 먹고 싼 걸 다시 땅으로 보내는 거죠. 그렇게 땅을 건강하게 만들어서 쓰고, 또 쓰고. 씨앗도 사는 게 아니라, 콩이며 팥이며 상추며 다 직접 받아서 쓰더라고요. 씨앗을 순환시키는 거죠. 이 땅에서 오천 년 동안 농사가 끊이지 않았던 비결이 거기(전통 농법)에 있더라고요.”

그때부터 토종 씨앗을 구하러 다녔다. 토종이 아니면 소용이 없었다. 개량종의 씨앗은 받아서 심어도 싹이 잘 트지 않는 ‘불임 씨앗’이다. 개량종 중에는 한 번 수확하면 아예 싹이 트지 않게 만든 ‘자살 씨앗’도 있다. 그러니 개량종을 쓰면 매년 종묘회사에서 씨앗을 살 수밖에 없다. 농부로서 자생력을 가지려면 씨앗을 직접 받아야 한다는 게 그의 생각이었다. 실제로 그가 십칠 년 동안 농사를 짓게 한 원동력도 토종 씨앗에 있었다.

“그때는 제가 밭농사를 하니까 주로 채소 씨앗을 얻으러 다녔어요. 근데 토종 볍씨도 들어오더라고요. 당시엔 벼농사는 꿈도 못 꿨죠. 귀농하지 않는 한 도시에서는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어요. 그러다 칠 년 전에 우보농장을 얻으면서 3평짜리 논을 만들었어요. 스무 가지 품종을 심었죠. 처음엔 씨가 한 오십 알밖에 없었어요. 근데 다음 해에 씨앗을 받아보니까 3천 평은 심을 수 있겠더라고요. 증식력이 거의 천 배에 달하는 거죠. 그다음 해에 바로 3,500평 논을 임대했어요.”

본격적인 토종벼 농사의 시작이었다.

우보농장은 농약, 화학비료, 제초제, 비닐을 일체 사용하지 않는다.
이곳은 생태텃밭을 경험하고 배울 수 있는 교육농장이기도 하다.

 

1910년도만 해도
1,450종이었던 토종벼

그 뒤로 그는 매년 평균 3천여 평의 토종벼 농사를 지었다. 지금까지 키운 토종벼만 백십여 종. 북극조, 버들벼, 돼지찰, 반달벼, 흑저도, 족제비찰, 구름찰벼… 토종벼는 다채로운 이름만큼이나 각기 고유한 빛을 낸다. 흔히 보던 황금빛 벼뿐만 아니라 할아버지 수염처럼 새하얀 벼, 흑돼지처럼 까맣거나, 대추처럼 붉은 벼, 풀잎처럼 녹색을 띠는 벼도 있다. 모두 자연을 닮은 오방색이다. 이름도 저마다 색이나 모양, 특성을 본 따 지었다. ‘흑’자가 들어가는 ‘흑저도’는 까맣고, ‘버들벼’는 이삭을 늘어뜨린 모습이 버드나무를 닮았다.

우보농장 토종벼(왼쪽 흑저도, 오른쪽 올벼)

 

토종벼가 자취를 감추기 시작한 건 일제강점기다. 일제는 군수물자를 확보하기 위해 수확량이 많은 개량종 농사를 강요했다. 그로 인해 70%의 토종벼가 역사 속으로 사라진다. 그나마 남은 토종벼조차 한국정부는 완전히 밀어낸다. 1970년대 생산량을 늘린다며 다수확 품종인 <통일벼>를 강요한 것이다. 하지만 개량종은 맛이 떨어진다며 거부하는 농부가 많았다. 그럴수록 정부는 혹독하게 농부들을 몰아붙였다. 통일벼를 재배하지 않으면 지도원이 찾아와 못자리를 짓밟았다는 기록이 남아있을 정도다. 결국, <통일벼> 보급은 각지의 기후와 풍토에 맞추어 발달한 전통농법이 파괴되는 결정타가 되었다.

“1910년도만 해도 우리나라에 1,450종의 토종벼가 있었어요. 헤아려보면 리 단위로 키우는 품종이 달랐단 거죠. 그만큼 식문화도 다양했겠죠. 쌀맛이 다르니까 술도, 떡도, 고추장 맛도 다 달랐을 거 아니에요. 얼마나 풍요로워요. 다양성이야말로 문화의 핵심인데, 지금은 다 사라졌죠.  
안타까운 건 사람들이 토종벼를 키우지 않는 이유로 맛이 없다거나, 키우기 어렵다거나, 수확량이 적다거나 하는 이유를 든다는 거예요. 그건 모르는 소리에요. 토종은 검증 한 번 못 받고 사라졌으니까요. 지금 토종벼를 키우는 농부는 0.00001%도 안 된다고 보면 돼요. 단순히 우리 거니까 지키자는 게 아니라 수백 년 동안 농부들이 이 땅에 맞게 육종해온 종자니까 저마다 다 가치가 있다는 거예요.”

지금 한국에 남아있는 토종벼는 사백오십여 종. 그중 25%는 우보농장에서 빛을 본 셈이다. 나머지는 대부분 박제된 채 농업유전자원센터에 보관되어 있다. 죽을 때까지 남은 삼백여 종을 다 심고, 먹어 보는 게 그의 바람이자 계획이다. “먹고 소비되지 않으면 의미가 없기 때문”이다. 토종은 보존 자체 중요한 게 아니라 시대에 맞게 쓰여야 한다는 게 그의 지론이다.

북극조가 제가 제일 좋아하는 벼에요. 키가 크고, 대나무처럼 꼿꼿한 게 강인한 모습이 엿보이잖아요. 맛도 묵직하고요. 북극조를 음악으로 표현한다면 메탈이 아닐까? 그 정도로 자기 개성이 강한 놈이에요”

 

앞으로 그는 토종벼를 주제로 예술가들과 다양한 실험을 할 생각이다. 종류가 워낙 다양하기 때문에 막걸리만 만들어도 백여 종의 술맛과 빛깔을 낼 수 있다. 그걸 음악으로 표현하면 어떤 선율이 나올까, 그림이나 영상으로는 어떻게 표현할 수 있을까. 그는 아직 해보고 싶은 게 많다. 10월 중순에는 쌀 가게도 열 생각이다. 이 공간에서 토종벼를 소재로 한 독특한 예술 작품을 만날 수 있길 기대한다.

 

 

우보농장 우보(이근이 대표). 지금 입고 있는 옷은 ‘올벼’를 그림으로 표현해 제작한 티셔츠이다.
그림은 이근이 대표의 딸이 직접 그렸다.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에 자리잡고 있다.
맞은 편에는 아파트가 보인다.
우보농장은 도시 속의 작은 오아시스 같은 곳이다.

우보농장은 토종 씨앗을 보관하고 전시한다.
“농부는 굶어 죽어도 종자를 베고 죽는다”
옛말이지만, 우보농장의 철학이 잘 드러나는 글귀다.

 

 

글_ 우민정
일러스트_우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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